화청궁의 기원은 서주(西周)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며, 처음에는 '리궁(驪宮)'이라 불렸고, 이후 진(秦), 한(漢), 수(隋) 왕조를 거치며 지속적으로 보수와 확장이 이루어졌다.
당나라 시기에 정점에 달하였는데, 당태종 시기에는 '탕천궁(湯泉宮)'으로 건설되었고, 당고종 때는 '온천궁(溫泉宮)'으로 개칭되었다.
당현종 천보 6년(747년)에 정식으로 '화청궁(華清宮)'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당현종은 매년 가을이면 양귀비를 데리고 여기로 와 추위를 피하며 다음 해까지 장안으로 돌아가지 않았는데, 이로 인해 화청궁은 성당 시기 중요한 정치·문화 중심지의 하나가 되었다.
안사의 난 이후 화청궁은 점차 쇠퇴하였고, 후대 왕조에서도 수리가 있었으나 예전의 규모를 회복하지는 못했다.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후, 정부는 1959년부터 대규모로 확장 및 복원 작업을 진행하여 오늘날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화청궁의 건축 배치는 엄격하며 산세를 따라 지형을 활용하고, 온천을 중심으로 주변으로 펼쳐져 있어 '천인합일(天人合一)'의 조원 이념을 잘 보여준다.
주요 건축물로는 비상전(飛霜殿), 만수전(萬壽殿), 장생전(長生殿), 우왕전(禹王殿) 등이 있으며, 그중 비상전은 당현종과 양귀비의 침전이었고, 장생전은 그들이 칠석절에 맹세를 나눈 상징적인 장소로, 백거이의 《장한가(長恨歌)》 속 '하늘에선 비익조가 되어 날고, 땅에선 연리지가 되리라 '는 천고절창을 간직하고 있다.
경내에는 당나라 어용 온천 유적 박물관도 보존되어 있는데, 연화탕(唐현종 전용), 해당탕(양귀비 전용) 등 다섯 개의 당대 온천탕이 발굴되어 당시 뛰어난 건축 기술과 예절 제도를 엿볼 수 있다. 또한 화청궁은 중국 근대사의 중요한 증거지이기도 하다.
1936년 '서안사변'이 이곳에서 발생하였으며, 오간정(五間廳)과 병간정(兵諫亭) 등의 유적은 여전히 선명하게 남아 있어, 장학량과 양호성이 장제스를 간언하며 국공합작을 통한 항일 전선 형성을 이끌어낸 역사적 전환점을 기록하고 있다.